서류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딱 맞다
며칠 전부터 사무실 한쪽 구석에 쌓아둔 서류 뭉치를 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처음 정부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을 때는 마냥 좋았다. 남들 다 받는다는 지원금도 받고, 우리 같은 소규모 연구 조직이 이런 자금을 끌어올 수 있다는 게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정산 시즌이 닥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예상했던 건 실험 데이터 정리나 결과물 공유 같은, 말 그대로 ‘연구’에 집중하는 시간이었지 회계 서류에 도장 찍고 영수증 풀칠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영수증 한 장 한 장 뒤에 적힌 날짜랑 카드 번호 맞추는 작업을 밤새 하고 있으니 이게 지금 연구를 하러 나온 건지 사무 보조를 하러 나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연구혁신비라더니 결국은 보수적인 검사뿐
뉴스에서는 연구 행정 서식을 대폭 줄인다고 하고, 심지어 총 연구비의 10% 정도는 아주 간편하게 증빙할 수 있는 ‘연구혁신비’라는 항목이 생겼다는 소식도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숨통이 트이나 싶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체감되는 건 여전히 깐깐한 잣대들이다. 정산 업무를 도와주는 외부 회계법인 분들은 당연히 그들의 매뉴얼대로 움직이겠지만, 때로는 그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00원짜리 하나까지 딱딱 맞춰야 하는 그 긴장감 속에서 내가 처음에 꿈꿨던 탄소나노튜브 관련 연구의 본질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연구 목적이 분명해도 정산 과정에서 사소한 문구 하나가 잘못 걸리면 보완하라는 메일이 날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맥이 툭 풀린다.
컨설팅업체 도움받아도 찜찜한 마음
주변에서는 아예 정부과제 관리해주는 컨설팅업체를 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보통 비용이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 단위까지 가기도 하는데, 우리 같은 영세한 곳에서는 그 비용도 사실 부담스럽다. 그래도 정산 때마다 앓는 소리 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 지인 소개로 한 곳 상담을 받아봤는데, 명쾌하게 속이 뚫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들도 결국 서류를 대신 ‘정리’해주는 것뿐이지, 연구의 가치를 이해하고 증명해주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모든 책임은 최종적으로 내가 져야 하는 건데 돈까지 들여가며 남의 손을 빌리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내가 직접 끝까지 붙잡고 투명하게 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 돈으로 연구 장비 부품 하나를 더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연구 환경에 대한 회의감
가끔 해외에 있는 동료들과 통화하다 보면 이런 한국의 연구 환경이 얼마나 소모적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 사람들은 연구비 규모가 어쩌고 창업 환경이 어쩌고 하지만, 나한테는 당장 눈앞의 증빙 서류 100장이 더 큰 장벽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고 떠들어도, 막상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행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어제는 연구소 설립 서류랑 정산 서류가 뒤섞여서 한 시간 동안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밤늦게 퇴근하며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 발걸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이 과제가 끝나면 다음에는 정말 안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다음 공고가 뜨면 또 신청서를 쓰고 있을 내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정산의 굴레
내일은 회계법인에서 지적한 항목들에 대한 소명서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 분명히 연구 목적으로 정당하게 지출한 건데, 서류상으로 그 ‘정당함’을 입증하려면 또 몇 시간을 자료 조사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정부 지원을 받는 게 특혜라고 말하지만, 이런 행정적인 피로감을 겪고 나면 이게 과연 남는 장사인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지원금을 안 받고 내 속 편하게 연구하는 게 더 생산적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냥 오늘은 이쯤 하고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서류 한 장이 또 비어있는 걸 발견했지만, 오늘 안으로 다 끝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